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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펜도 과학이다.
아빠, 엄마, 오빠 그리고 나.
우리집 식구 모두에겐 가슴속 저 깊숙한 곳에서 부터 우러나오는 독일제 제품에 대한 경외심이 있다.

아빠와 오빠의 공통분모- Mercedes Benz
엄마의 영원한 로망      - Fissler 냄비세트와 HENCKEL 일명 쌍둥이칼
그리고 나...그들에 비해 많이 찌질하지만 Steadtler 필기구 상당 아낀다.

내가 정확히 스태들러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한 건 2004년 어느 우울한 봄날이었다.
당시 나는 적을 둔 곳이라곤 이얼싼 어학원이 전부인 대학원입시생이자 막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지 않는(못한)다는 이유로 사회적 지탄과 동정을 동시에 받는 백수였다. 
학원생들의 뜨거운 향학열은 그저 빈둥대며 살아가던 내게 세찬 동기부여는커녕 더욱 큰 삶의 공허함만을 떠넘겨주었고, 나는 그 공허함의 무게조차 이겨내지 못해 학원으로 가던 도중 종종 딴길로 샜고 수시로 광화문 교보문고를 들쑤시곤 했다. 도서, 음반, 학용품코너 어느곳하나 편애하지 않고 차근차근 그 장소를 맴돌았다. 

대학교 때까지 나는 여느 여학생들이 그러하듯 다양한 색깔펜을 구비하여 즐긋기 상비체제를 구축하는 부류 중 하나였다.
당시엔 주로 펜 한자루 위아래 양쪽으로 굵고 얇은 싸인펜을 각각 달고 있는 Tombow의 playcolor 2 시리즈를 미친듯이 사댔었다.
허나 학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필기구를 쓸일이라곤 노트테이킹(일명 속기..)할 때가 대부분인지라,
정작 필요한 건 형형색색 아름다운 색깔펜이 아니라 손에 쥐었을 때 안정적인 그립감을 안겨주고, 볼펜심 볼의 회전력이 우수해 자유자재로 좌우상하 율동이 가능한 놈이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날..(나름 기념비적인 날이지만 정확한 날짜까지 기억하는 건 무리) 교보문고 학용품 코너를 어슬렁거리다가 나는 보고야 말았다.
세상의 모든 시련을 짊어진 것마냥 불안과 동요에 시달리던 암울한 백수 학원생 본인에게 더없이 큰 안정감을 주었던 세모반듯한 균형잡힌 자태를 지닌 채, 네모반듯 종렬횡대한 triplus 볼펜 네자루.

나의 문구사용연대를 둘로 나누고자 한다면 그건 바로 스태들러에 빠져들기 전과 후이다. 
저 심플한 디자인에 견줄만한 탁월한 드로잉력을 구비한 제품이다. 난 triplus 볼펜을 시작으로 스태들러 사용범위를 서서히 확장해 나갔다. 가끔은 오빠 필통에서 나에겐 별 필요도 없는 제도용 연필과 샤프를 훔쳐내기도 했다. 
우수한 볼펜을 널리 알리고자 학원에도 열심히 나갔다. -_-; 모두를 설득할 순 없었지만 제법 여러명의 수험생들을 설득시켜 스태들러사에서 리필 볼펜심하나조차 받지 못한채, 나는 나름 가열차게 그들의 판로를 개척해주었다. 

오랜만에 볼펜을 쥐고 서면작업을 할 일이 생겨서 한 자루 손에 쥔김에 그와 얽힌 추억이 잠깐 생각이 났나보다.
넌 여전히 아름답구나.

    

 

by conpanna | 2007/11/19 12:00 | space | 트랙백(1) | 덧글(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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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Stella et F.. at 2007/11/19 18:57

제목 : 제목을 잘 못 봤습니다. ㅠ.ㅠ
볼펜도 과학이다. by conpanna님가장 자주 들르는 '과학밸리'에 갔는데, 인기글 제목에 눈에 띄더군요. '볼펜도 과학이다.'란 제목의 글이었습니다. 그래서 들어가 재밌게 읽어 봤습니다. 그런데... 사실 처음에는 제목을 잘 못 봤답니다. 제가 읽은 제목은...'불펌'도 과학이다.conpanna님 죄송합니다. ㅠ.ㅠ...more

Commented by 가고일 at 2007/11/19 12:49
전공이 미술이었는지라......스테들러와 톰보우의 "연필"만 줄창 써댔습니다.....

실상 연필은 종이와 직접 '마찰'하는 물건이고 그런 의미에서 손을 가장 많이 타는 물건이죠.
'선'의 스피드와 균질함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거든요. (색연필도 마찬가지)

스테들러 제도기 세트도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중저급 세트가 10만원 정도?)
콤파스 같은 경우 다리의 흔들림이 0.1mm만 있어도 돌리고 나면 원이 틀어지죠.(쓰는 선의 굵기가 그 이하가 많음.)
잡고 있다 보면 진짜 정밀기계 만지는 기분이거든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7/11/19 14:25
쌍동이 칼의 서브브랜드가 있죠. 헨켈 인터내셔널이라고... 쌍동이가 아니고 외동인데 태국 등지에서 만들었고, 열라 무뎌요.
Commented by conpanna at 2007/11/19 17:22
가고일님, 저도 어린이 시절 미술학원 다닐 때 톰보우 4B연필과 잠자리 지우개를 무지 열심히 사댔던 기억이 나요. 그땐 말랑말랑한 지우개 찌꺼기를 안끊고 길게 실처럼 뽑아내는 놀이에 심취했었죠. 전 항상 그런 식이었어요.
미술학원은 지우개 놀이 재미로 다니고, 서예학원은 빨래비누로 붓 빠는 재미로 다니고...-_-;;

bluexmas님, 저도 어디선가 짝퉁 헬켈칼을 본 기억이 나요. 무딘 칼 쓰는 일도 못할 짓이지만, 쌍둥이 칼은 과하게 잘들어서 감히 사용 못하겠더라구요. 특히나 엄지손가락에 칼을 한번 박은 이후론 칼만 봐도 손가락이 오그라들어서...덜덜덜
Commented by 꼬깔 at 2007/11/19 18:50
전 잠자리 지우개만 생각나네요. :) 그런 볼펜이 있었군요. 전 제목을 '불펌도 과학이다.'로 봤습니다. :) 이런이런... :) 좋은 하루 되세요.
Commented by Abby at 2007/11/19 19:03
모나미 볼펜은 좀 그렇고, 미국 bic볼펜을 애용했었는데, 스테들러 tiplus 볼펜 꼭 사보고 싶어집니다 ^^
"더없이 큰 안정감을 주었던 세모반듯한 균형잡힌 자태" ,, 많이 기대되요. 잘 읽고 갑니다~
Commented by 응삼 at 2007/11/19 19:53
휘슬러 밥통은 얼마전 독일로 출장을 다녀오신분에게 들었는데..
독일은 펜도 유명하군요.. ^0^
꼭 참고하여.. 내년에 반드시 챙겨 와야겠습니당..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쫑쫑 at 2007/11/19 20:13
옷은 메이커 안 입어도 연필 같은 건 좋은거 써보려고 노력했는데 이런 글 보면 구매욕구가 막 치솟는다니까요~
그나저나 빨래비누로 붓 빠는 재미라니.. 공감입니다 prz
Commented by 심리 at 2007/11/19 20:21
이건 스테들러 '직접' 광고..... ^^ 저도 볼펜똥 같은 게 묻어날 때마다 좋은 볼펜을 쓰고 싶다는 욕구에 사로잡히곤 했었답니다. 그렇게 좋은 볼펜이라니 꼭 사서 써봐야겠네요. 추억의 사용담 잘 읽었습니다.

볼펜으로 그림을 그려서 유명해진 우리나라 화가도 계시다고 뉴스에 나왔어요. 저도 볼펜으로 그림도 그려보고 싶네요. 평소에 워낙 많이 쓰기도 하고요.
Commented by 됴취네뷔 at 2007/11/19 20:34
스테들러 샤프를 쓰고있는데, 역시 샤프심도 중요하지만 샤프도 중요하다는것을 깨닿게해준물건입니다. 사실 파일롯샤프를 쓰다 단종되고나서 스테들러샤프를 쓰게 된거지만...
정말 끝내줍니다..
Commented by conpanna at 2007/11/19 21:25
꼬깔님도 좋은 하루 되세요. 불펌도 과학이 될법하지 않을까요?!^^

Abby님, 정삼각형은 정말 가장 균형잡힌, 안정적인, 완벽한 형태임이 틀립없습니다!

응삼님, 휘슬러 압력밥솥은 쌀, 고구마, 옥수수 등등 뭘 삶아내도 최고의 맛을 선사하는 대단한 물건이라구요~ 물론 스태들러도 최곳!!

쫑쫑님, 혹시 빨래비누로 붓 빠는 재미를 아세요?! 지금 다시 해보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지네요. ^^

심리님, 이 글이 널리널리 퍼져서 스태들러 관계자 귀에까지 들어가면 저 리필심 하나쯤은 받아낼 수 있을까요?!

됴취네뷔님, 정말 '일단 한번 써보시라니까요'라는 말은 말장난이 아닌거죠. 써봐야 알아요들!! ^^
Commented by 카코포니 at 2007/11/19 22:20
그러고보니 3대 장인정신의 나라...하면 저는
독일(기계, 정밀제품, 자동차), 이탈리아(세공품, 패션, 악기류, 자동차) 그리고 일본(전자제품, 자동차)이 떠오르는데.

역시 그중에서는 독일이 가장 완벽주의적인 이미지가 강한거 같습니다.
(우연인지 몰라도 3개국 모두 2차 대전시 추축국에 속했던 나라군요..)
Commented by An_Oz at 2007/11/19 23:20
스태들러 쓰고 나서 빅은 아웃오브안중됐어요.. ㅠ_ㅠ
Commented by 笑兒 at 2007/11/20 02:06
와아, 이펜 :)
보들보들하고, 스스슥, 잘 나가서 좋아요 :)
(..다만 이동네 종이 질이 워낙 안좋다보니; 빅이나 papermate으로 연명중이지만 ㅠㅠ )
Commented by conpanna at 2007/11/20 13:57
카코포니님, 저도 글 쓰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었어요. 암튼 독일제 제품은 정말 튼실튼실 합니다요~

An_Oz님, 사실 빅은 미국판 모나미153볼펜이죠, 저도 자주 쓰긴 하지만;;;

笑兒님, 그쵸?! 정말 필기감이 훌륭한 펜이에요. 동감해주시니까 기뻐요 ^^
Commented by Dataman at 2007/11/20 19:14
저는 150원짜리만을 애용합니다만 그 원인은 이겁니다.

...새로 산 펜은 한달을 넘기지 못하고 어디서 흘려 잃어버린다.

그런 면에서 깔끔하게 정리 잘 하는 분들이 부러울 때가 많습니다.
Commented by 백발소년 at 2007/11/21 12:54
저는 스태들러연필(2H, 4H)을 쓰고 있는데 역시나 좀 흐리더군요. 게다가 이건 써도써도 길이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문제가(죽기 전에 다 써보기나 하려나...) 나중에 누군가에게 들어보니 독일쪽이 좀 색을 연하게 낸다길래 파버 카스텔은 냅다 HB로 집어왔습니다. 어쨌든 그 필기감이란 ;ㅅ;
Commented by conpanna at 2007/11/21 15:22
Dataman님, 저도 살아생전 볼펜 사서 잉크 다 닳아버릴 때까지 안 잃어버리고 써본 적이 단한번도 없답니다. (싸인펜 잉크가 마르도록 쓴 기억은 더러 있는데 말이죠)
고로, 저역시 깔끔하게 정리 잘하는 분들은 무지무지 부럽답니다.

백발소년님, 첨에는 스태들러 태클 들어오는 줄 알고, 잠시 긴장했었습니다. 정말 볼펜심하나 받아내지 못하면서 왜이리 스태들러에 찐따마냥 집착하는 걸까요;;;
Commented by macrostar at 2008/01/08 23:29
휘슬러 요리 기구 저 무척 좋아합니다. 번쩍 번쩍 번들 번들.
스태들러도 물론 좋지만, 기회가 닿으면 다른 것도 써보세요. 밤하늘의 별처럼 다양찬란한 문구류의 세계는 정말 굉장한거 같아요!
Commented by conpanna at 2008/01/09 00:53
엄마가 몇달전에 휘슬러 냄비세트를 사서 광에 쌓아놓으시며, 너 시집가면 주려고 샀다며 얼른 결혼을 하라고 꼬시더라구요.
택도 없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상자를 뜯어서 고 새삥한 놈들을 보고나니 진지하게 아무나 붙잡아서 시집을 가야하는 건 아닌가하고 1분정도 고민했어요. macrostar님의 충고대로 앞으론 문구류에서의 활동반경을 전격적으로 넓혀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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